생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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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제주희귀식물 여로
2009-01-16 15:02:12 - 작성자곶자왈 () 조회수10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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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형에 적응한 빙하기 유존식물
[김봉찬의 제주희귀식물- 51] 여로
서귀포신문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서울 인근에 새로 개장한 스키장은 연일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어느 산간 마을에서는 밤새 내린 눈을 치우지 못해 고립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겨울 풍경이 제각기 다르고 그 대처하는 방식 또한 여러 가지인 모양이다.
이 겨울 식물들은 휴면에 들어가 있다. 말라버린 줄기와 몇 장의 낙엽이 한때 화려하게 꽃을 피워냈던 흔적을 어렴풋이 더듬어낼 뿐 화단의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젊은 날에 이러한 풍경은 그저 쓸쓸하고 초라한 정경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식물의 휴면은 자연의 순환을 연결시키는 위대한 고리처럼 느껴진다. 마치 인간의 죽음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푸른빛이 사라진 정원은 오히려 희망적이다.
여로(Veratrum maackii var.japonicum)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만주 등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데 한라산, 지리산, 경상도, 충북, 강원도, 경기도, 평남, 함북, 함남에 야생한다. 다 자라면 키가 40~60cm 정도 되는데 두 세장의 긴 잎이 줄기 밑에서부터 어긋나게 달린다. 꽃은 7-8월 여름철에 피는데 녹색 또는 연한 자주빛으로 줄기 끝에서 여러 송이가 꽃차례를 이루며 모여 핀다.
여로가 자생하는 곳은 고산초원지대이다. 한라산 구상나무림 사이나 시로미, 털진달래 군락 사이 햇볕이 잘 드는 풀밭에 서식한다. 비교적 물기가 있는 곳을 좋아하며 설앵초, 구름체꽃, 한라부추, 산비장이, 애기원추리 등과 함께 어우러져 군락을 이룬다.
간혹 낙엽활엽수림대에 서식하는 여로를 볼 수도 있다. 단풍나무, 서어나무 등이 주를 이루는 2차림의 경우 숲 안까지 서식지를 확장시켜 자생하는 여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발 500-600m 정도의 난대 초지에서도 여로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제주에서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여로는 원래 온대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종으로 난대 초지에서 서식하는 여로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여로뿐만이 아니라 산비장이, 구름체꽃 등이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은 아마도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피뿌리풀과 같은 경우로 빙하기 유존식물이 제주의 독특한 지형과 토양에 적응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후 빙하기 당시 육지부와 연결되어 있는데다 현저하게 기온이 낮았던 제주지역(평균기온이 0~3℃)에는 다양한 북방계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 후 기온이 상승하면서 많은 식물들이 사라져버렸지만 섬 중앙에 높은 산이 있어 일부는 살아남아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식물들을 빙하기 유존식물이라 하며 돌매화나무, 시로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최후 화산폭발로 형성된 기생화산(오름)의 경우 송이층이 발달하여 배수가 잘 되고 표토가 빈약한 특징이 있어 유존식물 중 일부는 한라산 정상이 아닌 저지대에서도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로 역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물론 지구온난화와 제주조릿대의 번성은 다른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여로에게도 매우 위협적이지만 말이다.
<김봉찬 / 곶자왈 사람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