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이야기
-
식물 린네
2008-04-08 10:05:08 - 작성자곶자왈 () 조회수2976
-
글 : 데이비드 콰멘____사진 : 헬렌 슈미츠
스웨덴 식물학자 칼 린네는 일찍이 ‘정보 설계자’였다.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동식물에 이름을 붙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살짝 공개합니다
스웨덴의 봄은 늦게 찾아온다. 1707년 5월 23일, 스웨덴의 작은 마을 스텐브로훌트에서 목사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도 계절은 여전히 봄이었다. 봄이 무르익지 않아 날씨는 쌀쌀하고 땅은 축축했다. 나무에 잎은 돋았지만 아직 꽃은 피지 않은 이른 봄날, 아이는 벌거숭이의 젖은 몸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아이의 아버지, 닐스 린네는 루터파 목사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였고 정원 가꾸기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는 부친의 성이었던 ‘잉게마르의 아들’ 대신 스웨덴어로 린덴나무를 뜻하는 ‘린드’에서 따온 이름 ‘린네’를 자신의 성으로 고쳐 썼다.
그는 식물 애호가였다. 아이의 어머니 크리스티나는 목사의 딸로 아이를 낳을 당시 고작 18세였다. 그들은 아기에게 칼이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부부가 훗날 세계 최고의 식물학자가 된 이 아이의 요람을 꽃으로 장식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이 아이는 투정을 부릴 때도 꽃 한 송이만 손에 쥐어주면 이내 잠잠해졌다고 한다. 꽃은 그에게 난생 처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맛보게 해준 관문과도 같았다. 심지어 그는 어린 나이에 꽃들이 그저 아름답고 다채롭기만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은 것 같다.
그는 곧 꽃과 꽃을 피우는 식물, 그리고 식물의 이름에도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따온 그 지방의 야생화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댔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린애였고 이름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내심이 바닥난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자꾸 잊어버리면 더 이상 가르쳐주지 않겠다”며 어린 칼을 야단쳤다. “그후 소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악착같이 식물 이름을 외웠다.” 식물 이름들과 그 이름에 담긴 다양한 정보들은 그의 평생의 연구 과제였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누린 어마어마한 명성과 변치 않는 그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 린네를 단순히 위대한 식물학자, 많은 책을 낸 저자, 이름을 잘 기억하는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좀더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는 ‘정보 설계자’였다.
백과사전이나 웹사이트에서 아주 짧은 약력만 읽어봐도 칼 린네가 ‘생물 분류학의 아버지’이고,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라틴어 이명법을 창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들도 그가 왜 그의 시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그처럼 중요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는지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여러분은 또한 그가 우리 인류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대담하게도 인간을 원숭이와 같은 포유류의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또한 사실이긴 하지만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린네는 본격적인 의미의 진화론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견해를 적극 수용한 인물이었다. 즉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 신비한 질서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물질세계에서 종교적인 의미만을 추구하는 그런 독실한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우리시대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의 다양성을 종교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기며 그 다양한 면모를 마음 깊이 품고자 했던 그의 열망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인류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생물을 찾아내어 숫자를 파악하고 이름을 지어주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모든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바로 정확하고 꾸준한 관찰과 체계이다.
출처 : http://www.nationalgeographic.co.kr/feature/index.asp?seq=38&artno=70